이곳은 장웨이수이 기념 광장이라는 이름이 붙어 있지만, 사실상 개인적인 비밀 장소에 가깝습니다. MRT 류장리역에서 도보로 이동하다 보면 길이 점차 좁아지고 경사가 상승하며 아침 시간에는 도로에 차량이 거의 없어 더욱 여유롭게 걸을 수 있습니다. 두 사람이 겨우 지나갈 수 있는 폭의 돌계단을 올라가면 도착하는 이곳은 그리 넓지 않은 공간에 가로로 긴 의자 두 개와 '혁명 선열 장웨이수이 선생의 묘'라는 글씨가 붉게 새겨진 비석만이 놓여 있습니다. 비석 아래에는 '무릇 우리 젊은 동지들은 반드시 있는 힘껏 분투하기를 바라며, 오래된 동지들은 더욱 단결하여 젊은 동지들을 적극적으로 돕고 동포 해방을 위해 힘씁시다!'라는 장웨이수이의 유언이 새겨져 있으며, 이는 대만인들에게 '각별히 단결하라'는 그의 바람을 담고 있습니다.
1931년 8월 5일, 장웨이수이는 41세의 젊은 나이에 장티푸스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는 대만 문화 계몽 운동에 헌신하며 대만인이 누려야 할 권리를 위해 싸웠고, 대만 문화 협회, 신문 <대만민보>, 대만 민중당 등을 설립하여 많은 이들의 존경을 받았습니다. 이러한 그의 활동으로 인해 일제강점기 일본 정부는 경찰과 특수 인력을 파견하여 그를 감시하였으나, 그의 장례식에는 여전히 5천 명이 넘는 사람들이 참석하여 마지막을 배웅했습니다. 장웨이수이가 세상을 떠난 1931년 그는 최초에 다즈산의 공동묘지에 묻혔으나, 1942년 전쟁 중 해당 공동묘지가 군사 요새로 사용되면서 그의 유골은 강제로 관두에 임시 안치되었습니다. 전쟁이 끝난 1952년에는 그의 오랜 동지들이 기부금을 모아 류장리 팡란산 기슭에 기념비를 세우고 유골을 새롭게 안치하였습니다. 그로부터 60년이 지난 후, 장웨이수이는 고향인 이란으로 돌아가 다시 한 번 안장되었으며 현재 류장리에는 기념비만이 남게 되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정부는 장웨이수이를 '혁명 선열'로 지정하였으며, 당시 부총통이자 1급 장군이었던 천청의 제안에 따라 그의 묘비에 해당 문구가 새겨지게 되었습니다. 묘비 아래에 새겨진 유언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계속 수정되었는데, 예를 들어 '무산 계급의 승리'가 '우리가 바라는 승리'로 변경되는 등 시대적 분위기의 영향을 받은 흔적이 다수 존재합니다. 이러한 장웨이수이의 대만 국민에 대한 공헌 정신은 오늘날에도 이곳을 찾는 많은 이들에게 기억되고 있으며 멀리 보이는 타이베이 전체를 마치 그가 지키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