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만 민주주의 운동사에서 정난룽의 위치는 대체 불가로, 6 미터 폭의 이 골목은 정난룽 선생이 매일 잡지사를 출퇴근하며 지나다닌 길이자 도의를 위해 분신으로써 희생한 장소이기도 합니다. 1984 년 3 월부터 1989 년 4 월까지, 정난룽은 잡지사에서 일하는 날이면 이 골목의 11 호 문패가 걸린 곳의 문을 열고 3 층 총편집장 집무실로 들어갔습니다. 그가 창간한 주간지 <자유시대>는 계엄체제와 대만 주둔군 사령부의 해제를 요구하고 대만 독립을 주장하는 시국 비판적인 글을 자주 게재하였습니다. 이들은 모두 당시 정부의 심기를 거스르는 내용이었기 때문에 기자와 투고자가 글로 인해 처벌받지 않도록 <자유시보> 목차 상에 필자의 이름을 종종 드러내지 않았으며 “본 간행물의 책임은 전적으로 총편집장 정난룽에게 있다”고 적기도 했습니다. 이 골목은 정난룽 선생을 체포하기 위한 작전이 수행되던 곳으로 1989 년 4 월 7 일 아침, 골목 주변에 백여 명의 경찰이 배치되고 소방차 역시 미리 골목길 입구에서 명령을 대기했습니다. 정난롱은 본래 <자유시대>에 법학자가 작성한 <대만공화국헌법초안>을 게재했다는 이유로 “반란” 혐의를 받아 기소되었지만, 언론 표현의 자유를 억압했다는 기소 이유를 부인하며 법정 출두를 거부한 채 스스로를 총편집장실에 가두었습니다. 경찰이 잡지사에 들이닥쳐 철문을 뚫으려 하는 순간 정난룽 선생은 휘발유를 뿌려 분신하였고, 오늘날 이곳 11 호 3 층은 정난룽 재단의 소재지이자 여전히 당시 불타버린 총편집장 집무실의 모습을 보존하고 있습니다.